문양목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한 후 사탕수수노동자로 하와이를 거처 샌프란시스코로 이민하였다.
이민 초기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함께 미 본토의 대표적인 국권회복단체인 대동보국회의 중앙총회장과 기관지 '대동공보'의 주필 겸 사장을 역임하였다.
1908년 3월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샌프란시스코의거에 깊숙이 관여하였으며 의거 후 재판전권위원과 재정위원을 맡아 공판을 독립재판으로 이끌었다.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를 통합시켜 해외교포 최고 기관인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하였으며 제2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과 기관지 공립신보의 발행인으로 미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많은 애국 시와 애국 논설을 발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2세교포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특히 박용만을 도와 소년병 학교와 대조선 국민군단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독립운동을 펼쳐 미국을 비롯한 열강제국에 한국인의 강인한 독립 의지를 확인시켰다.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이민하면서 한인사회의 주요 인물이었으나 평생 노동으로 생활하면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개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에 대한 학술적 조사와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오랜 기간의 독신생활과 36년의 이민 생활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출판인으로 그리고 교육자와 문필가로 초인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평생 단 한 번의 모국 방문도 가족 상봉도 못한 채 오직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기에 선생의 독립정신이 더욱 위대한 것이다.
■ 성장과정
문양목 선생이 태어난 남면 몽산2리는 본래 몽대라 불리던 마을로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다. 몽대마을은 어촌과 농촌이 복합된 마을이다. 문양목 선생은 아버지와 함께 몽대포구의 청계산 기슭에서 연근해어업과 농사를 지으면서 소년 시절을 보낸다 .
당시의 선생은 불의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품으로 한학을 배우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삼십 리 거리의 태안향교를 오가면서 더 큰 지식을 갈망하기도 하며 근면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자라난다.
동학사상에 특별한 관심과 사상을 가져 부인 김씨와 사별 후 단양 이씨와의 결혼으로 3남1녀를 두었으며 각 이름을 모두 동학사상의 종지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이념으로 천혁, 지역, 인혁 등으로 작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