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7월 문양목 선생과 박용만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재미한인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의 설립을 결의한다. 1909년 6월 네브라스카주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가 설립되고 문양목 선생은 미재소년병학교라는 글을 발표하여 학생들을 권유 입교시키는 등 사관양성에 힘쓴다.
1914년 6월에는 하와이 오아후섬 쿨라우가 지방에서 대조선 군민군단이 편성되고 국민군단사관학교가 건립된다.
■ 이승만과의 인연
박용만 선생은 문양목 선생을 만날 때 마다 이승만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을 자랑하였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복역 중 독립협회 사건으로 수감된 박용만과 신흥우를 만나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원칙을 밝힘으로써 민중을 계몽하려는 원대한 뜻으로 ‘독립정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그의 감옥생활이 끝나고 석방되기 직전 34장이 완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양목 선생과 인연이 닿게 된다.
이 책은 박용만에 의하여 몰래 미국으로 반출되어 문양목 선생에 의해 출판된다.
■ 박용만의 후원자
당시 교민들은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우성 박용만의 3파로 나뉘어졌는데 독립목적은 같았으나 독립운동의 형태가 달라 교포사회의 단결을 어렵게 하였다.
문양목 선생은 박용만 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박용만 선생을 전적으로 후원하였다.
<국민보>에 글을 기고하여 국민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한인사회를 단합하였으며 박용만 선생의 사관학교 양성에도 함께 하였다.
■ 분열
이승만 선생과 박용만 선생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이승만은 중앙학원을 기숙학교화 하면서 하와이 국민회의에 예산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박용만 선생과 감정싸움이 발생한 것이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방식인 무력투쟁운동으로는 독립이 불가하므로 예산을 기숙학교에 돌리도록 여론을 만들며 본인이 창설한 <태평양잡지>에 ‘교민들이 노동으로 힘들여 번 돈을 전쟁놀이에 소비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다. 박용만은 이 시도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의 자기기반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보고 배신감에 사로잡히던 중 하필 국민회의 회계 관계자가 건축비를 유용한 사건이 터진다. 이승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민회의 의무금을 교육사업에 쓰지 않고 모두 써버렸으니 앞으로 모든 재정은 교육정책에만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낸다.
이로써 두 동지는 영원히 배신자로 등을 돌린다.
대조선 국민군단의 군사학교가 이승만과 박용만 두 지도자간의 불화로 3년여만에 해체되고 군사독립의 주축은 미주에서 중국으로 옮겨진 뒤, 박용만은 북경에 군사통일위원회를 설립하며 독립군의 결집을 호소하는 등 독립에 힘썼으나 러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 자금을 받았다는 의심을 사 국민회의 의열단원인 이해명에게 암살당한다.
■ 신흥우와의 관계
신흥우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이승만, 서재필과 협성회를 조직하여 근대화운동을 벌이고 18세에는 정치개혁을 주장하다 경성감옥에 투옥되어 이승만과 두번째 인연을 맺는 등 활발히 활동하는 운동가였다.
문양목 선생과의 인연은 1911년 대학졸업 후 배재학당의 교장으로 귀국하던 신흥우에게 딸 필원을 부탁하면서부터다.
문양목 선생의 외손인 이필웅과 고향 친척들은 신흥우가 문필원을 양녀로 들였다고 이야기를 전한다. 선생의 특별한 부탁으로 후견인이 되어준 것이다.
■ 안창호와의 관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비밀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독립의 근간을 마련한 안창호는 1910년 문양목 선생의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미국 내 최대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발족한다.
그리고 문양목 선생이 대한인국민회 회장이던 1912년 박용만의 도움을 얻어 중앙총회를 설립한다.
문양목 선생은 도산과 독립운동의 방향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도산의 인품과 독립의지를 흠모하면서 어려운 일은 직접 자문을 구하거나 서신으로 연락하며 서로가 도움을 청했다.
1938년 안창호의 사망소식에 선생은 교포사회의 추도회를 주도하면서 진정한 지도자를 상실함에 크게 비통하였다.
■ 이대위 목사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설립한 상향친목회에서 총무와 서기를 맡았으며 공립협회조직에 발기인으로 동참하였다.
대한인국민회의 초대 부회장으로 총무인 문양목 선생과 같이 통합과 창립에 따른 제반활동을 하였다.
이대위는 종교인, 교육자, 발명가이며 언론인으로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며 이민국 정식 통역관이었다.
그 외에도 독신 교포들의 사진결혼을 주선하면서 동분서주한 교포지도자 중에서 가장 바쁘게 헌신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건강이 허락치 않았는지 50세를 겨우 넘기고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프러스 공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