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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우운 문양목 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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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단체결성

    ■ 독립단체결성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하는 한인 숫자는 25여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4년 이후 하와이 이민자의 일부가 본토로 이주하면서 그 수가 49명이 되자 초대회장을 안창호로 하는 공립협회가 설립된다.

    공립협회가 추진하던 주요사업인 신문 공립신보는 조국 내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보도하며 그 불법성을 규탄하는 한편, 한인의 당면 급무, 교육과 실업 진흥, 그리고 항일독립전쟁의 준비 등을 강조하는 기사와 논설을 개제하였다.

    1906년 하와이에서 미주 본토로 이주한 1천여명의 한인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문양목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단체를 수소문하여 대동교육회를 알게된다. 여기서 동학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던 장경, 백일규 등과 만나 대동보국회 결성에 참여한다. 대동보국회 역시 신문으로 대동공보를 발행한다.

    한편, 공립협회가 내세우던 공화주의 정치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던 장경, 김우제등의 보수근왕파 인물들은 190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대동교육회를 결성한다.

    하와이는 분산되어 있던 한인단체들이 호놀룰루에 모여 합동 발기대회를 열고 1907년 9월 2일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여 흩어져 있던 단체를 하나로 통합한다. 이 단체는 호놀룰루 릴리하 거리에 중앙회관을 두고 47개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으며 회원 수는 설립 초기에 1,050명. 기관지로 합성신보를 발행하다 이후 주밀국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한인합성협회 건원절 기념사진
    이와 같이 하와이에서 합성협회가 성립되자 미주 본토에서도 1908년 스티븐스 처단 의거를 계기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간에 통합논의가 전개되었다. 미주 본토의 협회는 1908년 7월 11~15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로 나타났으며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북미지방의 공립협회가 하나로 통합되며 국립회가 창립된다.

    이때 하와이 국민회총회장에는 정원명, 미주 국민회총회장에는 정재관이 선임되었으며 발간지로는 신한민보가 발간, 이후 신한국보로 이름이 바뀐다.

    이후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중앙회와의 연락을 끊으며 임시대통령 임명을 받고도 권력투쟁을 일으키는 등 계속하여 사건이 이어지자 재미한인단체의 연립제도가 파괴되었다. 문양목 선생은 총회장직을 사임하고 박용만과 독립운동을 하고자 1913년 8월 하와이로 떠난다.

    ■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역대 총회장 및 부회장 명단

    선거연월일 총회장 부회장 비고
    1 1910.2 황사락 이대위 총무 문양목
    2 1911.2 문양목 강명화  
    3 1912.2 강명화 주원  
    4 1913.2 이대위 조성학  
    5 1915.2 이대위 황사선  
    6 1916.2 강영소 황사선  
    7 1918.2 이대위 임정구  
    8 1919.2 임정구 회장겸임  
    9 1920.2 강영소 황사선